[편집자 주] 지난 6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북미 AA(Against Ableism) CRPD(장애인권리협약) 대표단’을 파견했다. 20여 명의 장애인·비장애인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6월 8일부터 20일까지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하며 한국의 장애인권리 약탈 현실을 알리고 미국과 캐나다와의 국제적 연대 기반을 다졌다.
이번 북미 투쟁은 UN CRPD 당사국 회의가 열리는 미국 뉴욕과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있고, 대형 시설 폐지를 통한 탈시설 운동을 전개하며 전장연 캐나다지부를 통한 국제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캐나다 몬트리올과 토론토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왜 북미로 떠났는지, 북미에서 무엇을 느끼고 돌아왔는지 대표단의 여정을 생생히 듣고 기록하고자 다양한 단원의 이야기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① 우리는 왜 머나먼 북미로 갔을까? / 박철균
②-1 특별함을 거부한다 / 김준우
②-2 평범함을 선택한다 / 김준우
나라고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없겠는가? 숨소리가 소음이 되고 콧김마저 성가신 나만의 동굴 속으로 숨어드는 충동질은 어쩌면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악어 떼 같기도 하다. 기습 충동질에 물리는 날엔 단 하루만이라도 몸이 움직여주길 애먼 데 애걸하기도 한다. 기어들어 갈 다리라도, 것도 아니면 부여잡을 수 있는 손가락이라도 꿈틀거려주길 잠꼬대 같은 꿈을 꾸기도 한다.
엄연한 것은, 손등에 앉은 모기 한 마리도 쫓지 못해 피 다 빨고 날아갈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현실이다. 한 치 오차 없이 전신마비 장애인이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더욱이 활동지원사 없는 24시간을 상상할 수 없는 내게 동굴은 철딱서니 없는 한낱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도 자명하다.
신체의 무기능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능은 노력이나 고민 이전에 서둘러 포기하는 게 상책이다. 동굴 속 대신 되레 몸뚱이를 동굴 밖 무리 안으로 힘껏 떠밀어 상황을 교란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고도 전신마비 장애인인 나의 일상 사용 설명서가 32년째 무탈하게 유용한 걸 보면 제법 괜찮은 삶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북미 AA CRPD 대표단 합류 결정이 내겐 의외로 단순하고 간단했다. 기차 타고 남해안을 가고 국제 항공편으로 일본과 홍콩을 다녀왔듯 방문 나라와 일정, 그리고 현지 환경 차이만 있을 뿐 내가 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4시간 장거리 비행에 따른 욕창 재발이 염려되어 부득이 비즈니스석을 예매해야 하는 비용 부담이 적잖이 걸리긴 했다. 하지만 국제적 연대를 목적으로 한 대표단의 북미 방문은 대의명분은 물론, 그동안 활동력의 한계로 인해 빚졌던 나의 책무 이행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유의미했다.
주변의 적지 않은 염려와 만류 또한 전신마비 장애인에게 갖는 편견이고 기우라는 것을 몸소 깨 보이고도 싶었다. 낯선 경험을 앞둔 적당한 스트레스가 설렘과 긴장으로 해석되는 순간이었다.
복병은 엉뚱한 곳에서 출몰했다. 고속도로 급커브 길에서 움푹 팬 물웅덩이를 맞닥뜨린 당혹감과 견줄 수 있겠다.
척수장애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세 배의 값비싼 항공료를 감수하며 비즈니스석을 예매했다. 그러나 항공사 측은 중증장애인 혼자 비즈니스석 탑승 불가를 주장하며 활동지원사 역시도 비즈니스석을 추가 예매해야만 탑승이 가능하다고 으름장을 놨다. 결과적으로 중증장애인은 천만 원 상당의 항공료를 지불해야만 미국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중증장애인 혼자는 비즈니스석도 이용할 수 없도록 장치한 아시아나항공사의 지침과 장애인 차별의 심각성도 인지 못 하는 그들의 궤변이 나의 오기를 발동시켰다.
국내 굴지의 항공사로부터 탑승 거부를 당할 거라곤 한순간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특수 고객 운송 신청서’라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서류로도 모자라 ‘항공 여행을 위한 의사 소견서’ 제출까지, 비상식적인 요구에 거침이 없었다. 요컨대, 의사의 판단에 의해 항공기 탑승 적합성을 결정하고 승인하겠다는 얘기였다. 사지마비 장애를 가진 나를 명확히 지목해 탑승을 거부한 것이다. 나는 고작 그들의 말 한마디에 핀셋으로 집혀 들어 올려진 이물질이 되어버렸다.
낯선 비장애인들 틈바귀에서 나 홀로 전신마비 장애인으로 서 있었다. 나를 가운데 두고 놀리듯 카메라 앵글이 어지럽게 도는 것 같았다. 아시아나항공사로부터 이 같은 부당한 절차를 요구받는 동안 내가 느낀 좌절과 모욕감은 잊고 있던 끔찍한 트라우마까지 소환하고야 말았다.
시설에 거주했을 당시, 소변을 지려 발가벗겨진 채 열 명이 넘는 종사자들에게 둘러싸였었다. 그 수치스러움에 난 나를 팽개치듯 버렸다. 30년이 지난 지금, 내게 남아있는 머리로라도 땅을 파 동굴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다. 나를 다시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와 다른 하나는 나의 동료와 동지들이 사방에 포진되어 있다는 것이다. 당당히 맞설 힘이 내게 있었다.
“저 출국 안 합니다.”
나의 느닷없는 발언에 대표단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사지마비 장애인 당사자는 나였고 몹쓸 치욕도 나의 것이었다.
“아시아나항공사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싸울 사람은 접니다. 누가 대신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미국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미국은 같은 곳에 있습니다. 언제든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 남아 제 할 일을 하겠습니다. 부디 잘 다녀오세요, 부탁합니다.”
센터 설립 초창기, 중증장애인 한 명의 활동지원 24시간 보장을 위해 센터의 사활을 걸었듯이, 장애인의 분리‧배제‧차별 행위를 서슴지 않는 아시아나항공사를 상대로 나의 무기한 농성 각오는 비장했다. 대표단이 보름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인천공항 바닥이 나의 너른 침대가 되어도 좋았다. 항공사가 쥔 칼자루 앞에서 비굴한 타협점을 찾아 비행기에 오르는 것보다 몇 배 더 마음 편안한 꿀잠을 잘 터였다.

기자회견장이 되어버린 공항은 불의에 저항하는 우리의 목소리가 벽에서 벽으로 파도치듯 메아리쳤다. 그리고 곧 항공사 측으로부터 안내에 오해가 있었다는 궁색한 변명 일색인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시시한 게임은 맥없이 끝이 났다. 주렁주렁 매단 항공사의 요란한 깡통은 역시나 빈 깡통이었다.
나는 특수 고객 대우를 받을 만큼 특별하지 않다. 활동지원사의 지원을 받으며 매달 통장에 찍히는 급여로 자립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매우 평범한 시민이다. 중증장애인이라는 이유가 결코 특별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북미 AA CRPD 대표단과 나란히 비행기에 탑승하고 목적지인 미국에 무사히 도착해서 계획된 일정을 소화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특별함을 거부한다.



